추억의 상자에 나열된 항목들은 만약 보금자리를 잃을 경우 가장 먼저 챙기고 싶은 순서대로 배치했다. 편지는 첫 번째다.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소중한 편지들을 보관하고 있다. 가끔 자신감이 떨어졌을 때, 편지를 읽으면 기운이 많이 난다. 편지는 평소에 상대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을 진심으로 전달하고 싶을 때,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잘 전할 수 있다. 어릴 때, 관계에 서툴러서 편지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도 있다. 말은 듣는 사람의 기억과 생각에 따라 다르게 기억될 수 있지만, 편지는 계속 보관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. 잘 기억하고, 추억할 수 있다.
초등학생 때, TV에서 본 타임캡슐을 보고 친구랑 많이 따라 해봤다. 캡슐에는 편지가 들어간다. 서로에게 몇 년 후 받을 걸 생각하며 쓴다. 다 쓰고 나면 집 근처에 사람들이 안 팔 것 같은 땅을 찾아서 묻는다. 땅 찾는 재미도 있다. 그런데 친구랑 둘 다 궁금한 걸 못 참아서 항상 며칠 뒤에 다시 꺼내보곤 했다. 언제는 꼭 1년 뒤에 꺼내자며 묻었는데, 어느 땅에 묻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못 꺼낸 적도 있다. 캡슐에 들어갔던 편지들과 함께 당시 친구랑 찍은 스티커 사진도 함께 산 커플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다.
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어떻게 하면 더 특별하게 찍을 수 있을까 하다가 2021년에 하늘색 토이 필름카메라를 구매했다. 이때부터 필카에 빠졌다. 끼는 필름마다 색감이 다 다르고, 스캔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찍혔는지 모르는 게 좋았다.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스캔을 맡기지 않고, 사용한 롤들을 많이 모은 후 몇 개월 혹은 일 년에 한 번 스캔하면 시간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, 특별한 추억 사진을 선물받는 것 같아서 기다린 만큼 몇 배로 더 설레고 행복하다. 받은 사진들을 친구들에게 보낼 때, 근황도 물어볼 수 있어서 관계 유지에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. 토이카메라를 잘 쓰다가 어쩌다 오빠 방에 들어갔는데 중고로 사놓고 안 쓴 펜탁스 필름카메라가 있길래 가졌다. 확실히 훨씬 더 분위기 있고, 예뻐서 토이카메라는 당근에 팔아버렸다. 펜탁스는 2022년 하반기까지 잘 쓰다가 여행 때 고장이 나서, 근처 카메라 상점에서 올림푸스를 구매했다. 올림푸스도 예뻤다. 더 영화같고, 부드러웠다. 잘 쓰다가 2023년부터는 필름값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해서 어릴 때 아버지가 쓰신 디지털 카메라로 갈아탔다. 디지털 카메라도 잘 쓰고 있다! 색감도 필카 못지않게 분위기 있고, 빈티지같고, 결과물을 바로 볼 수 있어서 편하다.
어릴 때, 소녀시대를 좋아했다. 그때는 어떻게 덕질을 하는지 잘 몰라서 앨범을 사고, 노래를 많이 들었다. 그나마 문방구에서 굿즈를 살 수 있었는데 굿즈를 발견한 날은 운 좋은 날이다. 다른 연예인들은 많이 보였지만 소녀시대는 거의 없었다. 양말 한두 켤레와 윤아 포토 키링을 구매했다. 윤아 키링은 몇 년간 보물 1호였고 지금도 잘 있다. 소녀시대 다음은 워너원이다. 이때는 머리가 좀 커서 콘서트도 가고 밤샘도 해보고 덕질을 제대로 해본 것 같다. 처음 겪는 일이 많았다.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를 배웠던 것 같다. 요즘도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. 어떤 건 슴슴하게 오래 좋아하고 어떤 건 푹 빠져있다. 사진첩을 볼 때마다 시기별로 좋아하는 게 다른 걸 보면 재밌다. 덕질은 힘들 때 힘이 되고, 도파민 그 자체라 다양하게 많으면 더 행복하다.
초등학생 때, 숙제로 일기를 썼다. 당시엔 억지로 썼지만,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다시 일기장을 펼쳐보니 남의 이야기 같아서 재밌고, 평범한 하루들이 기록되어 있는 게 좋았다. 그래서 고등학생 때도 일기를 썼다. 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매일 쓰려고 노력했다. 다만... 버스 안에서 쓰다보니 글씨가 삐뚤빼뚤하고, 입시생이라 감정기복이 오락가락해서 이때 일기는 잘 못 본다. 내용이 드라마 같고 감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. 성인 이후에는 수첩, 핸드폰 메모장, 블로그 등 다양하게 기록하고 싶은 대로 쓰고 있다. 매일 쓰지는 않고 하루를 정말 온전하게 다 기억하고 싶을 때 주로 쓴다. 사실적이고 생생한 묘사가 많아서 다시 읽으면 바로 그날로 소환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. 기억이 가까워서 더 그런 것 같다.
첫 해외여행으로 프랑스와 스위스를 다녀왔다. 처음이라 그런지 이때 산 기념품들은 유독 소중하다. 구매해놓고 다 쓰진 않고 아까워서 보관하고 장식만 해두고 있다. 그나마 시계는 계속 착용했었는데 고장이 나서 고쳐두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다. 여행 때 사진을 봐도 추억을 회상할 수 있지만 물건은 사진처럼 데이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있어서 그런지 눈에 잘 띄고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.